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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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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test 조회 3회 작성일 25-03-1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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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의 저서‘택리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성계가 외성을 쌓으려 했으나 둘레의 원근(遠近)을 결정하지 못하던 중에 큰눈이 내렸는데, 일정한 경계를 두고 안쪽은 눈이 녹아 사라지고 바깥쪽으로 눈이 쌓이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를 보고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한양도성이 설성(雪城)으로 불리게 된.


그러면서 "조선 후기 이중환 인문지리서 <택리지>에도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곳과 같은 정보가 중요하게 기술돼 있다"고 전했다.


앞서 고려대 소장본 <청구도> 속 진해만 위치에 '칠천량 해전'이 기록된 사실도 확인됐다.


http://www.scpr.or.kr/


'정유원균여왜전패몰'이라는 문구로, 정유년 원균이 왜군과 싸워 패해 몰락한 곳이란 뜻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택리지(擇里志)>의 기록을 인용해 비봉에 세워진 비석에 무학왕심도차(無學枉尋到此)가 새겨진 사실과 도선(道詵)이 세운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완당전집>에도 해당 비석을 요승무학왕심도차지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로 언급하고 있다.


즉, 비봉에 세워진 비석의 존재는.


18세기 이중환이 <택리지(擇里志)>에서 이렇게 묘사할 정도였다.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고을로 장수와 정승을 많이 배출했다.


토지가 비옥한 데다 강산의 풍광도 빼어나서 사대부들이 부유함을 자랑하여 저택과 누정 가꾸기를 즐겼다.


이들은 설령 벼슬을 하지 않아도 잘 노는 귀공자(한량‧閑良)라는.


구미는 조선조 실학자인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선산은 삼국시대부터 일선, 숭선, 선주로.


이중환이택리지에서 조선인재의 보고라고 칭송한 선산이 야은 길재(吉再)부터 김숙자-김종직-하위지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 성리학의 산실이었기 때문일.


이중환의택리지에도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하는 곳이며 주민들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라고 적혀있다.


1465년(세조 11) 건립된 가흥창은 119칸의 창고로 충청도와 경상도의 세공을 받아 보관하였다가 국영 창고 경창으로 수송하는 대규모 물류단지였다.


고을 인심과 지리를 논한 ‘동국여지승람’(노사신 외)‘택리지’(이중환) ‘상택지’(서유구)를 뒤적여 본다.


강산은 변했고 인심도 변해 옛 책을 믿을 수 없다.


‘생거 진천 사거 용인’이라던데, 충북 진천으로 가볼까? 경기 용인시민은 불편하겠다.


실제로 용인에 사설 공원 묘지가 많다.


이중환은택리지에서 전주를 상찬한다.


하지만 21세기형 삶과 복거(卜居)는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생각과 철학의 대전환이 지름길 아닐까? 야만의 시대를 극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상생과 협력, 나눔과 이타심, 상식과 관용이 향기로운 공기처럼 흐르는 그런 세상 아닐까? 모든 게.


이연수 바른역사 시민연대 공동대표 조선 영조때의 남인 유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전라도 사람은 간사함을 숭상하여 나쁜데에 쉽게 움직인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중환은 팔도의 인심을 다루면서 경상도외에는 아주 혹평을 하고 있다.


오직 경상도 사람들에게만 "풍속이 진실하다"고 적고 있다.


책택리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이 전국 각지의 지리, 풍속, 인심 등을 기록한 책 음식디미방: 조선시대 최초의 한글 요리책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이후.


『택리지』 “아래 땅에 사는 사람들이 우러러 보다.


” 『유백두산기』 “천지가 크다 해도, 내 가슴 속에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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